작성일 : 22-03-14 13:38
호텔신라 성희롱 피해자 “상사도, 인사팀도, 고용노동부도 믿지마세요”
 글쓴이 : 전태군
조회 : 67  
#2016년 여름. 면세점 내 화물 엘리베이터에 가해자와 단둘이 탑승했다. 문이 열려 내리려 하는데 갑자기 가해자가 “내려”라고 말하며 엉덩이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설마 잘못 친 거겠지’ 열심히 합리화하고 털어냈다.

#2016년 11월. 면세점 내 카페테리아에서 간담회에 참석했다. 가해자는 내 왼쪽에 앉았다. 미팅 중간쯤 허벅지 쪽 느낌이 이상해 내려다보니 가해자의 오른쪽 손날이 내 왼쪽 허벅지에 붙어있었다. …가해자가 손을 올려댈 때마다 계속해서 손날로 쳐냈다. 현실 같지 않았다. 아무도 내 상황을 눈치채 주지 않았다.

#2016년 12월. 가해자가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손이 잡혔다. 제발 (성희롱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3초만 더 세어보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3초가 지나고, 지나고 또 지났다. 가해자의 손을 쳐냈다. …어느새 돌아온 가해자가 마치 확인시켜주듯 양손으로 양 허리를 잡아 올렸다. 머리가 암전이 됐다. 귀에서 삐 소리가 났다. 내 인생이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20대 여성 이아무개씨가 지난해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했을 때 주치의 권유로 썼던 글의 일부다. 그는 2015년 12월 입사해 2020년 6월까지 햇수로 5년간 호텔신라에서 일했다. 이씨는 그 5년을 “성희롱을 피하느라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입사 2년차인 2016년 같은 팀 상사 ㄱ씨로부터 세차례 강제추행을 당했다.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사내 조사나 징계위원회 개최는 이뤄지지 않았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사무실 자리와 직무를 바꿔준 게 회사가 취한 ‘분리조치’였다. 이후에도 가해자를 주기적으로 마주치던 이씨는 결국 2019년 2월 인사팀에 직접 피해를 신고했다. 징계위가 열렸고 가해자는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았다. 가해자가 복귀하자 두 사람은 또다시 같은 부서에서 일했다. 견디다 못한 피해자는 결국 휴직했고 복귀 이후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강제추행과 사내 2차 가해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은 이씨는 결국 퇴사해 정신과 폐쇄병동에 두 달간 입원했다.

지난 4일 만난 이씨는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가 질 수밖에 없도록 짜인 판에서 죽지 않고 버티기 너무 힘들었다”면서도 “이대로 묻고 가기에는 나와 같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고, 일하게 될 여성들이 마음에 걸려 5년간 겪은 일을 알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인터뷰 일주일만인 지난 10일 있었던 1심에서 재판부는 강제추행 혐의로 ㄱ씨에게 벌금 700만원(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을 선고했다. 이씨가 고소(2020년 6월)한 지 1년6개월이 훨씬 넘었다. <한겨레>는 1심 판결 및 고용노동부 진정 결과, 피해자 진단서 등 수사·행정·의료기관의 공식조사 내용과 피해자 대면 인터뷰를 토대로 지난 5년을 재구성했다.

■ “실수했다 쳐라” 상부의 은폐… 피해자만 ‘부서 뺑뺑이’

3차례 강제추행 이후 2017년 1월 이씨는 ㄴ그룹장과의 면담에서 피해 사실을 상세히 털어놨다. 일주일 뒤 돌아온 말은 이랬다. “내가 (가해자에게) 강하게 경고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잘 지내봐. 사람이니까 한 번 실수했다 치고.” 6개월 뒤 견디다 못한 이씨는 다시 ㄴ그룹장에게 분리조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버텨보려 했지만 제가 왜 저 사람과 밥을 먹고 말을 해야 하는지… 두 달 넘게 체하기만 합니다.” 회사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가해자의 근무지를 인천지점으로 옮기거나(두 사람은 서울지점에서 함께 근무했다), 피해자가 비서로 직무를 바꾸거나. “가해자가 근무지를 옮겨도 전화·이메일로 수시로 연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어요. 분리가 절실했던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비서직으로 옮겼어요. 비서로 일하면 근무지도 인천으로 바뀌고, 가해자와 상대적으로 덜 부딪힐 거라 생각했어요.”

피해자가 근무지와 직무 모두 바꿨지만 ‘분리’는 이뤄지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팀 소속이어서 보고·행사·회식자리에서 불시에 마주치곤 했다. 급기야 2018년 초 서울지점에서 근무하던 가해자는 피해자가 일하는 인천으로 근무지를 옮긴다. 호텔신라가 인천공항 제2여객터미널 면세점 입찰을 따내면서 이뤄진 발령이다. 두 사람은 회식, 행사, 각종 교육일정에서 마주쳤다.

“제게 묻지도 않고 가해자를 발령냈어요. …하루는 임직원이 다 모여 성희롱 예방교육을 듣는데 인사팀이 ‘우리 회사는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하면 가·피해자를 즉시 분리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더라고요. 정작 저는 이 교육일정이 가해자와 겹칠까 필사적으로 스케줄을 조정했는데요.”

꾹꾹 눌러왔던 울분은 이듬해인 2019년 2월 터졌다. 비서 업무 중 하나인 ‘생일자 업무’를 하다가 명단에 적힌 가해자 이름을 봤다. 가해자의 케이크와 상품권을 준비하던 이씨는 빈 회의실에서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인사팀에 사건을 ‘직보’하기로 결심한다. “보고체계가 중요한 회사에서 직속 상사를 거치지 않고 인사팀에 바로 신고하면 불이익을 받을까 상사(ㄴ그룹장)에게 신고를 했었는데 이미 한번 묵살됐잖아요. 더는 참을 수 없었어요.”

이후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소집해 가해자에게 정직 1개월 징계를 내린다. 그러면서 가해자가 한달 후 돌아와도 “받아줄” 다른 부서가 없으니, 분리되고 싶다면 피해자인 이씨가 부서를 옮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왜 피해자가 가해자 사정까지 고려해야 하느냐, 나는 더는 부서 옮기고 싶지 않다”고 거부 의사를 명확히 밝혔으나, 사측의 회유와 설득에 다시 한 번 부서를 옮긴다.

“부서를 옮기면 새 업무에 적응해야 하고, 무엇보다 소문에 시달려야 해요. ‘왜 옮겼니’ ‘나는 알고 있어’ ‘가해자는 억울하다더라’같은 말들에 다시 노출되는 거죠. 직장 내 성폭력 사건에서 보통 가해자는 상사잖아요. 가해자의 인적 네트워크가 피해자보다 넓기에 소문이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마음을 아무리 다스려도 소문은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그 일’은 계속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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